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월튼 워커 (문단 편집) == 기타 == [[6.25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1983년 [[대한민국 국방부]] 선정 4대 명장으로 이름을 올렸다.[[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7076862#new_comment_area|#]]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이 [[M41 워커 불독]]이란 경전차를 개발했는데, 전차의 명칭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워커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의 지명에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SK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과 [[비스타 워커힐 서울]], 그리고 [[워커힐아파트]]의 워커힐이 바로 이 지명을 의미한다. 워커힐 호텔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려서 지어진 명칭이란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워커를 기리는 기념비 및 동상도 세워졌으나 [[더글라스 맥아더]]와 견주면 철저하게 잊혀졌다. 아래는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밌게도 이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당시 북한의 [[김여정]]이 광진구 '''워커힐'''에 있는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여동생이 북한과 싸운 워커를 기른 장소에서 지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맥아더 자신은 워커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이 없었고. 그냥 저냥 늙다리이자 버거운 부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워커의 공이 잊혀진 것도 사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워커가 순직하지 않았다면 맥아더에 의해서 해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워커 사후 워커의 참모들 중 상당수가 리지웨이에 의해서 전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지만 리지웨이가 맥아더파 인물이라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매튜 B. 리지웨이]] 문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리지웨이는 맥아더 휘하에 있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맥아더 라인 장교도 아니었고, 맥아더가 월권을 휘두르기 좋아하는 정치장군임을 경계하여 워커의 후임으로 미 8군에 부임할 때 아예 맥아더와 담판을 통해 간섭을 하지 말 것을 못박을 정도였다. 그랬음에도 맥아더 및 그 이너서클 장군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리지웨이의 장교 교체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참모진의 교체,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 이후 지속된 후퇴로 패배주의가 만연한 장교진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볼 수 있다.] 쇼맨십이 특기인 맥아더나 어느 정도 기자들에 대해서 온화한 리지웨이에 비해서 딱딱거리는 편이 많아서 기자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마거릿 히긴스의 회고담에서도 은근히 돌려서 깔 정도. 사실 워커의 공이 이런 이유로 묻힌 것도 있다. 실제로 워커에 대해서 나온 전기는 단 두편. 그것도 한편은 사망 직후에 나온 전기이다. 동시대의 역대 미 8군 사령관들이 이전이나 이후 커리어 때문에 전기가 굉장히 많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전형적인 무골이었다. 워커 중장의 사고 이후 이승만은 워커 중장의 부인에게 북진 도중 영변 근처에서 노획한 김일성의 소련제 리무진 [[https://en.wikipedia.org/wiki/ZIS-110|ZIS110]]을 선물로 주었다. 워커 부인은 1951년 7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 자동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미국제 승용차로 교환했다. 그 후 김일성의 리무진은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쳐오다 198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6월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거액을 주고 기부를 했다는 후문이 기부 전시실에 있다. 워커 중장의 사고건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던터라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은 최종운이라는 하전사가 특수부대를 이끌고 유엔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일련의 작전에서 워커가 거느린 대규모 후퇴 대열을 기습해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 지금도 심심하면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는 아예 후퇴중에 워커가 탱크에 깔려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학식|구내 식당]]이 있'''었'''다[* 2019년 7월부터 폐지]. 이름은 워커 하우스(Walker House). 설명에 따르면, 건물이 6.25 전쟁 당시 미 8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에 그의 이름을 딴 미군부대인 [[캠프 워커]]가 존재한다. [[파일:external/0b74cc4820bf4579f739d6c1820340a2131bd5698da16524cdbfd081933f6c0f.jpg|width=500]] 용산 주한미군의 제8군 사령부 영내에는 지난 2010년부터 워커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2017년 4월 25일, 워커 장군의 동상을 주한 미 육군의 새 사령부가 들어서는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사진의 휠체어 탄 사람은 [[백선엽]] 장군. 2016년 [[국방TV]] 개국 11주년 특집으로 그를 기리는 다큐를 방영했다. [youtube(wdJfsk-9p-c)] 서울 지하철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 건너편에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https://m.blog.naver.com/baekunki/221452298804|#]] 그의 아들인 샘 워커는 아버지와 같이 한국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4성장군에 남동유럽 연합군 사령관으로 전역하였다. 이후 2015년에 91세로 사망하였다. [[분류:1889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벨 카운티 출신 인물]][[분류: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6.25 전쟁/군인]][[분류:6.25 전쟁/사망자]][[분류:알링턴 국립묘지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